회개 30

타데오 원로 17

71. 하느님의 선물인 인간의 과학에 의해 드러난 것으로서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손상을 입히는 지식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72. 은총은 모든 곳에서 활동적인 하느님의 힘이지만 특별히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활성화됩니다. 73. 만일 우리의 양심이 어떤 일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꾸짖는다면, 우리는 내면의 평화를 지닐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평화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74.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보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망한다면, 그때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였으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75. 회개는 우리의 삶..

타데오 원로 16

66. 50년의 공산주의 지배는 500년의 터키인들(이 지운) 멍에보다 훨씬 더한 악영향을 우리에게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67.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욕망이 악한 탓에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들 안에 회개가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신자들 안에도, 비신자들 안에도 회개가 없습니다. 68. 기도가 없거나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희망이 없는 곳에서 마술이 행해집니다. 69. 오로지 사랑과 선함만이 사람들과 온 세상 모두를 구원합니다. 폭력으로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합니다. 힘과 물리력, 강제는 그저 거부감과 증오만을 불러일으킬 따름입니다. 70. 과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지식은 사람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며, ..

타데오 원로 15

66. 50년의 공산주의 지배는 500년의 터키인들(이 지운) 멍에보다 훨씬 더한 악영향을 우리에게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67.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욕망이 악한 탓에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들 안에 회개가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신자들 안에도, 비신자들 안에도 회개가 없습니다. 68. 기도가 없거나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희망이 없는 곳에서 마술이 행해집니다. 69. 오로지 사랑과 선함만이 사람들과 온 세상 모두를 구원합니다. 폭력으로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합니다. 힘과 물리력, 강제는 그저 거부감과 증오만을 불러일으킬 따름입니다. 70. 과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지식은 사람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며, ..

사제는 증인일 따름

질문과 대답 질문: 누구라도 사제더러 고백성사때 들은 내용에 대해 말하라고 강요할 수 있나요? 대답: 비록 수많은 소설과 히치콕 경(Sir A. Hitchcock, 1899-1980)의 영화 ‘나는 고백한다’ 와 같은 많은 영화들이 특별히 이같은 주제를 다뤄왔지만,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제도 회개하는 신도의 고백 내용을 드러내도록 강요당할 수 없다. 회개와 고백성사 안에는 신도와 하느님, 그리고 영적 아버지 사이에 ‘봉인’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모든 고백은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전달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홀로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성하고 엄숙한 과..

타데오 원로 5

13.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볼 것이나, 깨끗하지 않은 마음은 영원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14. 주님은 우리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시며,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그분에게로 돌아설 때 그분은 곧바로 우리를 위로해주신다. 15. 네 마음 안에 평화를 유지할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있는 것을 실천하여라. 이 말은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한다는 뜻이다. 16.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빼고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17. 어떤 죄가 용서되었다는 표시는, 만일 그 죄가 되풀이하여 저질러젔지만 영혼 안에 여전히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웃음짓는 것

회개한다는 것은 위로 올려다 보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며 도리어 웃음을 짓는 것이다. 회개는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단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들이 바르게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우리 자신의 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다.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1934- )